白河真님(@Dand3110N) 작품
태풍 직전
현대AU
캐붕 주의
왜 아까 나는 가위를 냈던 걸까. 아직도 실실대면서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어주던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바깥은 태풍 직전이라고 비가 퍼붓다 못해 아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서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로 간신히 비를 막아내며 집으로 가는 길 위를 걸어갔다. 이미 보도를 걷는 발은 물을 흠뻑 머금고 있었고, 바짓단은 축축하게 젖은 채 이게 비를 맞는 건지 막는 건지 모를 꼴을 취하고 있었다. 그와중에 쪄 죽을 듯 후끈후끈한 열기. 안 그래도 더위에 약한데, 이게 진짜 무슨 꼬라지냐. 손목에 달랑달랑 심부름 봉투를 들고 걷고 있으면 뒤에서 무슨 바람 소리 같은 게 점점 가까워졌다. 무슨 소린가 싶어 슬쩍 뒤를 돌아보면 이 빗길을 맹렬하게 질주하는 검은색 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느려지는 세상과 거칠게 물웅덩이에 부딪히는 그 검은색 차의 바퀴. 그리고 한껏 제 쪽으로 뿌려지는 탁한 물.
"젠장."
결국 나는 터져 나오는 욕설을 참을 수 없었다.
한껏 축 가라앉은 기분으로 집 문을 두드리면 빨간 머리 녀석이 나를 반기려다 화들짝 놀랐다. 그래, 니가 봐도 내가 아주 쫄딱 젖었지. 대충 손목에 걸고 있던 걸 그 녀석 얼굴에 집어 던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 찝찝해. 축축해. 짜증 나. 이게 무슨 꼴이냐, 대체. 터져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어 길게도 내쉬며 제 웃옷을 냅다 바닥에 내던졌다.
"야, 수건이나 내놔."
"그림죠, 너는 또 어디서 그리 젖은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시끄러. 가다가 물 한 바가지 퍼맞았다고. 빌어먹을 녀석, 좀 차를 물웅덩이 있는 곳에서는 속도 좀 늦출 것이지. 가뜩이나 가는 길 내내 비도 퍼붓는데. 자기만 갈 길 가면 되나."
제게 건네지는 수건을 받으며 급한 대로 제 몸에 묻어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머리도 젖었잖아. 그 차, 얼마나 세게 달린 거야? 물기를 닦아내고 있으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제 옆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멀뚱히 보고 있는 녀석에게로 향했다.
"아주 남은 시켜 먹고 너는 집에서 쉬고 있으니 좋지?"
"그러게 누가 가위바위보에서 지래. 애초에 그거 네가 먼저 말한 거잖아."
"시끄러워. 왜 말 한 마디를 안 지냐. 제기랄, 짜증나……."
괜한 화풀이를 토해내면 누굴 닮아가는 건지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꾸가 돌아왔다. 지금은 나갔다가 비도 맞고 물벼락도 맞은 사람 편을 들어주면 안 되나? 안 그래도 더운 여름, 작년보다 훨씬 습도가 높아서 쪄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긴 졌으니까 얌전히 나갔다 와줬잖아. 속으로 궁시렁대면서 선풍기 앞자리에 앉아 남은 물기를 말렸다. 선풍기 앞에서 몸을 말리고 있으면 빨래가 된 것 같았다. 깊게도 한숨을 내쉬면서 거의 머리를 선풍기에 박다 싶이 대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제 볼에 차가운 비닐의 감촉이 닿았다. 머리를 들지 않은 채로 슬쩍 눈동자를 굴리면 그가 어딘가 어색하게, 뻘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순히 제 볼에 닿은 아이스크림 봉투를 까서 입에 넣으면 청량한 소다 맛이 퍼졌다. 달아. 한껏 찌푸리고 있던 얼굴의 인상이 조금 누그러졌다.
"기분 풀어라. 내일은 태풍도 불어서 바깥도 못 나가니, 종일 네 상대나 해줄 테니까. "
"……. 뭐 해줄 건데."
"집이라 검도 대련은 무리고, 너 요즘 마음에 드는 게임 생겼다며. 같이 해줄게. 기분 풀릴 때까지."
"쳇……. 그것 때문에 풀어주는 건 아냐."
"오냐, 그래. 풀어줘서 고맙다, 그림죠."
옆에 앉아서 제 머리를 헝클이는 손길. 어색하게나마 달래는 말투. 삐쭉 튀어나왔던 입술이 천천히 제 위치를 찾아갔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빨아대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 녀석이 안심했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진작 이렇게 풀어주려 했으면 어디가 좀 좋아. 그 웃는 얼굴을 따라 자신도 아이스크림을 문 채로 살풋 눈을 휘어주며 웃음을 지으면 휙, 얼굴이 들렸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던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대신 녀석의 입술이 제 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빨을 세워 입술이 뜯기는 것도, 피가 새어 나오는 것도, 서로가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의 맛이 입속에서 섞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서로의 얼굴과 머리칼을 붙잡고 다급하게 혀를 비볐다.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지면 서로의 입술 사이로 핏기 어린 붉은 실이 이어졌다. 핏기 도는 입술을 혀로 쓸어내며 눈을 치켜올리자, 가끔 보던 녀석의 성질 더러워 보이는 웃음이 있었다.
"야, 고양아."
"누가 고양이야. 이왕이면 표범이라 부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게임 하기 전에 다른 게임이나 한 판 할까."
하. 녀석이 걸고 있는 것과 비슷한 미소가 제 입에도 걸렸다.
"더워 죽겠는데 에어컨은."
"어제부로 고장."
"쳇,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
"조금 더워도 참아."
누가 할 소리를. 땅바닥에서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은 어느새 뒷전이 된 채, 추적추적 세상을 가득 메운 빗소리를 배경으로 녀석의 몸이 제 위로 겹쳐졌다.